항목 ID | GC092005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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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 萬德寺 - |
영어공식명칭 | Geumsan Temple Site Mandeoksa |
이칭/별칭 | 금산 만덕사지,만덕사 터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지송 |
소재지 | 금산 만덕사 터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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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절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절터.
[개설]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는 율정 윤택(尹澤)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옛날 윤택의 아버지가 성곡리에 들어와 남의집살이를 하였다. 하루는 진악산(進樂山) 자락에서 꼴을 베고 있는데 웬 스님들이 “저기는 당대발복 자리요, 저기는 만대영화 자리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사람들이 알아들으면 안되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며 입단속을 하는 한 대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를 들은 윤택이 수풀에서 나와 그 대사를 붙들고 하소연하였다. “지금 부친이 돌아가신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아직 묫자리를 잡지 못해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택이 대사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자, 대사는 하는 수 없이 당대발복 자리를 원하는지 만대영화 자리를 원하는지 물었다. 윤택 부친이 당대발복 자리를 원하자 대사는 그 자리를 알려 주었다. 만대영화 자리 또한 윤택 부친이 물었지만 대사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윤택의 아버지는 감사함을 전하고, 대사가 알려 준 자리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커다란 솥이 나왔다. 솥을 꺼내 안을 보니 옛날 돈이 가득하였고, 그 돈으로 윤택 집안은 당장 부자가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윤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에 윤택 아버지의 묘를 썼다. 그러자 유복자 아들 윤택이 큰 벼슬길에 올랐으니, 그곳을 명당자리 매미혈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성곡리는 명산 진악산에 자리 잡고 있어 명당자리가 많다고 한다.
[변천]
만덕사(萬德寺)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조구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말 율정(菜事) 윤택(尹澤)[1289~1370]이 금산 지역 최초의 사액 서원인 성곡서원(星谷書院)을 건립하여 수학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산군읍지(錦山郡邑誌)』, 『범우고(梵宇攷)』에 ‘만덕사’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고, 『금산군읍지(錦山郡邑誌)』, 『범우고(梵宇攷)』에 “금폐(今廢)”로 되어 있어 18세기 후반 경에 사찰이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금산 만덕사 터는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다. 성곡1리 개안이마을에서 개삼터를 지나면 귀덕이골이 나온다. 귀덕이골이 금산 만덕사 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비교적 평평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현황]
인근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수몰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현장 조사 결과 금산 만덕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잡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사찰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