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760
한자 朴東植
이칭/별칭 박충실(朴忠實),춘실(春實)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병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박동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동식 의병 봉기
활동 시기/일시 1909년 5월 - 박동식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박동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박동식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금산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박동식(朴東植)[1875~1914]은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박충실(朴忠實)이고, 호는 춘실(春實)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라는 내용의 격문을 돌렸으며,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과 함께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치렀다. 1906년에는 최익현의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최익현 체포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박동식은 1907년 말 문태서(文泰瑞)의 부대와 연합하여 도선봉으로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무주군,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에서 10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박동식이 이끈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14일 경상남도 함양군 영각사(靈覺寺)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1908년 5월 26일에는 무주군 구천사(九泉寺)를 습격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이외에도 6월 24일 도현리(道峴里), 7월 22일 진안군 지장산(地藏山), 11월 27일 무주군 부남면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전라북도관찰사 이두황(李斗璜)이 1909년 5월 13일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박동식 의병부대는 1909년 4~5월에 걸쳐 용담군 이동면[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동향면]에 주둔한 일본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다. 박동식은 무주·진안·함양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는데, 금산을 거점으로 군비를 정돈하고 작전 계획을 세운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동식은 1909년 5월 도리카이[鳥飼]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함양 수비대와 조우하여 교전한 끝에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1914년에는 전주형무소에서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이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자진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동식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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