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첩사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57
한자 大捷祠 -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영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6년연표보기 - 대첩사 건립
소재지 대첩사 터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지도보기
성격 사당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에 있는 개항기 사당.

[개설]

1592년(선조 25) 7월 8일 광주목사 권율은 금산성을 점령한 왜군이 진산의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성으로 갈 것을 예측하고 이치에 진을 쳤고, 소식을 들은 선봉장 황진(黃進)이치로 달려갔다. 동년 7월 20일 왜군은 아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왔고, 양 진영은 육박전(肉薄戰)으로 오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황진이 조총을 맞고 물러난 후 권율이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호령하니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고, 적이 조금씩 물러났다. 또한 권율의 조카인 권승경은 기병장으로 이치에서 약 7.85㎞[20리] 떨어진 영정곡의 산골짜기에 잠복해 있다가 퇴각하는 왜군을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육지 전쟁에서 승리한 첫 번째 전투로 ‘이치대첩’ 또는 ‘이치싸움’이라고 하며, 여기에 힙입어 권율은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치대첩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성공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발판이 되었다.

대첩사(大捷祠)임진왜란이치대첩(梨峙大捷)을 기념하고 그 충혼을 모신 사당으로,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과 부하 3,000명을 거느리고 투항한 일본인 김충선 등 156위를 모신 사우이다.

[변천]

1866년(고종 3) 현재의 금산군 금성면 상가리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대첩사를 함께 세워 그 뜻을 기렸다. 대첩사는 원래 순조 때 나주 지역에 장충사로 건립되었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과 사우 훼철령으로 훼철되었었다. 이후 1886년 호남 유생들과 후손들의 발의로 이치대첩비를 건립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1902년(고종 39)에 사론이 다시 일어나 감사와 수령들의 협조로 금곡에 이치대첩비가 세워졌다. 1903년(고종 40)에 설단하고 춘추 향사하다가 사우 건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사람들이 1926년 현재의 금곡사를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위치]

대첩사 터금산군 금성면 상가리 쇠실에 있다.

[현황]

현재의 비석은 1964년에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에서 이치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중턱에 다시 세운 것으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짓고 송성용(宋成鏞)이 쓴 비문을 다시 새긴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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