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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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박초롱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금산은 충청남도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영동·완주·무주·진안·대전·옥천 등과 인접하며,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각각 군의 중북부와 동남부를 지나는 산악지대에 해당된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금산 지역은 옛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어 지정학적·방어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삼한 시대]
삼한 시대 때 금산은 마한에 속하였다. 그러나 마한 소국 가운데 금산 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은 알 수 없으며, 전북특별자치도 여산에 비정되고 있는 여래비리국이나 전주에 비정되는 불사분야국에 인접하고 있어 금산도 영향력이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금산 창평리 유적에서 주거지 65기, 수혈유구 61기, 토기가마 1기 등의 대규모 취락 유적이 확인된 바 있어 금산 지역의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삼국 시대]
금산 지역은 삼국 시대 백제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완산주에 속하였던 진잉을군 1개군과 황산군의 영현이었던 진동현으로 분할되어 편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 어떻게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에 편제되었는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금산 지역에서 조사된 유적을 통해 백제 중앙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되는 유적은 금산 수당리 유적이다. 금산 수당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의 복합 유적으로 이곳에서 백제 시대 주거지와 분묘 등이 조사된 바 있다. 이에 5세기 백제가 금산이나 진안을 통해 가야로 연결되는 내륙교통로를 장악하고 가야 세력과 교류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 시대 석곽묘에서는 중국제 흑갈유도기편이나 환두대도·살포 등 피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이 출토되어, 그 피장자를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역의 유력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장대리 고분군에서는 신라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과 유사한 양식의 토기류가 출토되고 있어, 6세기 중엽 신라의 지방 진출과 관련하여 이곳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처럼 금산 지역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였으며, 이에 따라 약 20여개소가 넘는 관방시설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도 백제 시대 산성은 백령산성을 비롯해 구례리 산성, 마전리 산성, 용문산성, 계원봉보루, 핏재산성, 금성산성, 만악리 초남산성, 곡남리 산성, 진산성, 계진리 산성, 수당리토성, 천내리 산성, 평촌리 산성 등 약 14개소에 이른다. 백제 산성들은 주로 금산의 북쪽에 집중되어 경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금산의 동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에도 각기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금산 지역은 백제 말기에 신라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산 지역 성곽 유적의 지형적인 위치와 시기로 살펴볼 때 나제간의 격돌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남북국 시대]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확보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편성하고, 그 밑에 소경·군·현을 두는 등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금산 지역의 진잉을군은 진례군으로 고쳐 완산주의 관할로 하였으며, 일부는 웅주 황산군의 진동현으로 편제하였다. 금산 지역에서 조사된 남북국 시대 유적으로는 신라의 유물 산포지 및 사찰을 들 수 있다. 먼저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진산면의 태고사와 경순왕이 충청북도 영국사에서 수학하다 때때로 이곳에 들러 휴양하며 몸을 안정시킨 곳인 신안사가 있다. 또한 886년(헌강왕 12)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보석사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